독서삼매경

[책]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 - 조세희; 난쏘공 다시읽기

GAP 2009. 7. 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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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라는 개념을 우리말로 바꾸면 '가장 잘팔리는 것'에 해당한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에는 작품이외의 많은 것들이 작용한다. 하지만, 10년 20년 30년을 지나도 사랑받는 '명작'이 되는데는 그 작품의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0년도 더지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으며 젊은 날의 방황을 이해하고, 아픔을 승화시키는 것럼, 시간이 지나도 변치않는 진실이 '명작'에는 담겨 있다. 이미 시대를 꾹꾹눌러담은 조세희 님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이 책 역시, 시간이 지나도 변치않는 '인간의 진실', '시대적 아픔'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조세희 

  독후감을 써보겠다는 것은 사실 핑계였다. 계속 핑계를 찾고 있었다. 언젠가 머리가 굵어지고, 더 많은 것을 보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러지 못했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던 이 작은 책을 다시 집어 들기가 너무 무거워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핑계꺼리를 찾고 있었다. 매번 책꽂이를 볼 때마다 이런 저런 정신없는 책 사이에서 작은 몸으로 버티고 있는 ‘난쏘공’을 볼 때마다, 너무 안쓰러워서 애써 외면해오고 있었다. 그러다 100만부 인쇄 소식에 맞추어 다시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펼쳐보았다. 독후감을 써보겠다고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이 조그만 난장이는 30년째 진한 슬픔을 토해낸다. 나는 한 시대의 슬픔이 아니라, 천년의 아픔이었다고, 오백년간의 소외였다고 난장이는 말하고 있다.


오백년 동안 지은 집을 허물었습니다.
  난장이의 아비는 노비였다. 그 아비의 아비도 노비였으며, 그는 오랜 세월 이어져온 노비 집안의 후손이다. 이제껏 그의 집안은 상속, 매매, 기증, 공축의 대상이었고, 노비 자신의 소유나 삶은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 시대의 일이 아니었다. 노비문서가 없어진 지금도 그는 태어나면서 난장이라는 신체적 낙인과 가난이라는 경제적 굴레 속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받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했다. 언제나 주변에 머무르며 방치당하고, 탄압받았다. 정직하게 살려했으나, 일한만큼 대우 받지 못했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가지려 했으나 거인의 그늘에 삶의 터전, 아니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선택했다. 어쩌면 난장이 가족의 작은 꿈은 자신의 집에서 가족끼리 모여서 따뜻한 밥과 고깃국을 한 끼 하는 것에 불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출생부터 달랐다. 나의 첫 호흡은 상처 난 곳에 산을 흘려 넣는 아픔이었지만
그의 첫 호흡은 편안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난장이의 아들은 결코 난장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비의 아들이 노비가 되듯, 난장이의 한과 가난의 굴레는 그의 3명의 아이들에게 계속된다. 영수, 영호, 영희는 은강 기업에서 일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그들은 제일 낮은 계급에 속했으며, 부당한 노동환경 속에서 그들의 젊음은 서서히 말라가고, 현실에 좌절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여도 생계를 꾸려나가기는 더 힘들어지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들은 삶의 터전마저 빼앗긴다. 또,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가진 자의 억압술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는다. 결국 영수는 사람을 죽이고 법정에 선다. 은강 그룹의 회장의 노동자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죽였다는, 부정한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펴나가지만, 영수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영희는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거인을 따라가지만 순결을 빼앗긴다. 난장이의 아들들은 난장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빼앗긴 난장이가 되어버린다.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난장이라는 신체적 결함이, 가난이라는 경제적 부족이 그 사람과 그의 자식들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삶을 옥죄고,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조차 포기하게 만든다. 버려진 땅에 모여들어, 그저 한 가족의 집을 가지려는 소박한 소망마저 짓밟아져야 하는가.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왜일까. 무너진 담벼락 사이의 문으로 걸어 나오는 난장이 가족들의 슬픔에 가슴이 아린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
  그렇다. 가진 것이 없다고, 신체적으로 부족하다고, 사회적 지위가 낮다하여도 우리 모두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동일하다.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이 작을 리 없고, 가진 게 없다고 소외받아선 안된다. 오히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난장이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가난과 슬픔이 아프게 어우러져 있다.
누군가는 소설 ‘난쏘공’을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고도성장을 추구하던 70년대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었던 한 시대의 슬픔과 소외였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90년대 후반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경험하였다. 영세 사업자는 도산했고, 노동자는 평생을 일해 온 직장에서 거리로 쫓겨났다. 거리에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생겨났고, 청년들은 일하지 못했다. 겨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경제위기를 핑계로 고된 노동과 부당한 임금을 강요당했고, 그것을 당연히 받아 들였다. 하지만, 그 시기에 자본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고금리로 부를 불렸고,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과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후 막대한 외자의 유입으로 대한민국 기업들은 자본의 폭발을 경험한다. 기업의 가치는 5배 10배로 뛰었고 이는 주식시장으로 이어져 많은 부자들을 양산해냈다. 그러나, IMF가 끝나고, 기업 경영 환경이 개선되었지만, 경제 상황과는 상관없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 줄어들은 임금은 다시 오르지 않았고, 일자리도 늘지 않았다. 회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고, 졸라맨 허리띠를 풀지 못하고 있다. 


삶은 언제나 전쟁이다.그러나 우리는 그 전쟁에서 패배만 한다
 뉴스를 보다 보면 가슴이 콱콱 막히는 일을 자주 접한다. 2만원 때문에 같이 지내던 16살 여학생을 죽인 노숙자, 의료보험법 개정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게 된 기초수급자 할아버지의 자살과 같은 사건은 결코 지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순간도 일자리를 잃은 장애인들이 난간에서 뛰어내리고, 철거촌의 이웃들은 끌려나가고 있다. 소설 ‘난쏘공’은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소외를 말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시대의 많은 노동자와 도시의 빈민들도 슬픈 난장이에 다름 아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과연 그런 세상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순수를 지키며 살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향해 난장이는 끊임없이 공을 쏘았다. 키가 작다고 달까지의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세계 기아민 돕기 후원회의 리플릿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나눔의 뺄셈은 곧 희망의 덧셈입니다.’ 모두가 조금만 덜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난장이에게 소박한 보금자리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밥 한그릇, 국 한사발 떠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33만의 이주노동자와 200만의 장애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너와 나를 위한 희망으로, 닿지 않는다고 포기하지말고, 그 희망을 향해 함께 손잡는 모두 노력이 있다면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12개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내 가슴에 박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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