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삼매경

[책]시를 잊은 그대에게,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독후감 책 후기

GAP 2016. 3. 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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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을 서는 사무실 밖으로는 밤새 눈이 내렸다. 눈은 세상의 소리를 잡아 먹어 눈이 오는 소리를 낸다. 소리가 사라진 밤, 창을 열어본다. 눈이 오는 밤은 특히 더 어두웠다. 겨우내 눈은 차곡히 쌓였고, 나는 그 틈새에 책장을 부지런히 넘겼다. 라디에이터 옆에 앉아 바싹 마른 책장을 넘겼다. 느긋하게 앉아 읽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겨울과 제법 잘 어울렸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지음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꽤 많은 글자를 소리 내서 읽었다. 인용되어 있는 시도 소리내서 읽었고, 본문도 소리내서 읽었다. 읽었던 부분을 다시 또 읽었다.



JTBC 김제동의 톡투유 '걱정말아요'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아픈 건 불행이다. 하지만 아픈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건 아픈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이가 썩으면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치아의 신경 덕에 우리는 썩은 이 고칠 생각을 하게 된다.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정녕 복이 있도다. 슬픔은 슬픔을 고칠 줄 알게 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다.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하루 하루가 억겁의 무게처럼 어깨를 짓누를 현실. 도시는 정글이 되었고, '생존'과 '경쟁'만 남은 야만의 시대에서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 마저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아파할 수 있는 권리는 자리를 잃었다. 적자생존. 아픈 것이 집단에 해를 끼치는 해가 되어버렸다. 혐오가 자라났다. 혐오는 구조적 문제와 본질을 왜면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도덕적 하자를 지워버린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무거운 마음에 잠시 책을 내려 놓았다. 슬픔이 기쁨에게. 교과서를 벗어난 시와 시인의 숨결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거듭 소리내서 읽었다. 나는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나는 이내 부끄러워진다. 내려 놓은 책의 출판사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Humanist"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영화 '책도둑' 혹은 '쉰들러 리스트'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혐오와 증오는 쉬웠지만 인간의 존엄과 용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용기만이 마지막 까지 옳았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공명인 것이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책은 총 12 챕터로 이루어진다. 챕터별로 저자는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흥미롭고 자유롭게 풀어낸다. 시와 영화, 광고를 오가며 입시를 위해 그저 밑줄 긋고 외우기만 했던 시의 본보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교과서에 실려 문제집에 의해 잘못 해석되어 이해되지 않았던 시들을 새롭게 제대로 해석한다. 문학 수업은 '제사'가 아니라 '축제'라 말한다. 이 축제를 저자의 '머리말'에서 처럼 '시를 잊은 이 땅의 모든 그대'와 함께 하길 희망한다.


▶ 목차


1.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신경림 〈갈대〉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2. 별이 빛나던 밤에 

순수의 시대 방정환 〈형제별〉 

어디서 무엇이 되어 김광석 〈저녁에〉,윤동주 〈별 헤는 밤〉 

별이 빛나는 밤에 이성선 〈사랑하는 별 하나〉 


3.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아름다운 퇴장 이형기 〈낙화〉, 복효근 〈목련 후기〉 

바람이 불다 김춘수 〈강우〉·〈바람〉·〈꽃〉 


4. 눈물은 왜 짠가

우동 한 그릇, 국밥 한 그릇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다시〉, 정호승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지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5. 그대 등 뒤의 사랑

즐거운 편지 황동규 〈즐거운 편지〉 

등 뒤의 수평선 박목월 〈배경〉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강은교 〈사랑법〉 


6. 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

기다리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다 죽어도 피천득 〈기다림〉, 기형도 〈엄마 걱정〉 

죽어도 기다리다 서정주 〈신부〉, 조지훈 〈석문〉 

죽다 김민부 〈서시〉 


7. 노래를 잊은 사람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나야 너 살아 있었구나! 황지우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김종삼 〈민간인〉 

나는 노래를 뚝 그쳤다 송수권 〈면민회의 날〉 


8.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김소월 〈부모〉·〈어려 듣고 자라 배워 내가 안 것은〉 

거울 속에 아버지가 보일 때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9.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유치환 〈그리움 1〉·〈바위〉·〈그리움 2〉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이영도 〈무제1〉, 유치환 〈행복〉 


10.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

‘겨울 나그네’와 ‘피리 부는 소년’ 빌헬름 뮐러 〈보리수〉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상병 〈귀천〉 


11.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 〈설야〉 

식민지 경성의 눈 내리는 밤 김광균 〈눈 오는 밤의 시〉·〈장곡천정에 오는 눈〉 


12.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

뻔한 시에 시비 걸기 김수영 〈눈〉·〈폭포〉 

기침과 가래의 정체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이제 감히, 대학 입시 때문에 지금도 억지로 시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든, 시를 향유하는 자리에서 소외된 노동하는 청년이든, 심야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시를 읊곤 하던 한때의 문학소녀든, 시라면 짐짓 모르쇠요 겉으로는 내 나이가 어떠냐 하면서도 속으로는 눈물 훔치는 중년의 어버이든, 아니 시라고는 당최 가까이 해 본 적 없는 그 누구든, 시를 잊은 이 땅의 모든 그대와 함께 나누고파 이렇게 책으로 펴냅니다.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지음〈머리말〉중에서




KBS TV, 책을 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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