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나는 인턴이다.

GAP 2011. 2. 3.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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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직을 서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 환자 보호자가 사왔다는 붕어빵을 하나 얻어먹으면서 병동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들과 크리스마스 꾸밈용 반짝이를 보자니 조금 센치한 마음도 든다. 종교를 넘어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휴일이라니. 아, 이번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된다던데, 어차피 병원 밖을 나갈일이 없어 나는 상관 없다. 제발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고요한 밤이 되었으면, 새벽에 두세시간 단잠을 방해받지 않고 깔끔하게 내일 아침 알람에 맞추어 일어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게 산타의 선물이 될꺼라 중얼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조금 일이 빨리 끝난덕에, 인턴 생활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싶어서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물론, 이런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수 차례, 인턴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싶어서 도전했으나, 어김없이 걸려오는 병동콜(해야할 일이 생기면 소속 병동이나 과에서 전화가 온다. 이를 '콜'이라 한다.)에 매번 끄적거리기를 반복하다 포기해야만 했다. 오늘은 성공 할 수 있을까. 고심해서 말머리를 꺼내 본다.

"2010년 3월 1일. 나는 인턴이 되었다."

요즘에는 국내 기업체 등에서도 '인턴사원' 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1958년도에 미국의 의사 수련제도를 한국에 도입한 이후 병원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인턴'이라는 단어는 병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인턴'이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각자의 이해는 다르다. 

"인턴( intern = in + tern )이 안에서 돈다는 말아니냐? 여러과를 돌면서 일을 하는거지." - 모교수님

"인턴을 돌고나니, 병원 내 모든 의국 복사기를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게 되었다."  - 친한선배

"인턴? 레지던트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 - 안친한 선배

"인턴말고, 의사불러와." - 응급실 환자

"선생님 CT 하나 찍으면 얼마 받습니까?" - 병동 환자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 때 필요한 사람" - 철지난 유머

"인턴? 그냥 잡일만 하는 노예지 노예" - 인턴 동기


이런 각자의 이해를 넘어, 병원 '인턴(intern, 수련의)'과정이 끝나면 '레지던트(resident, 전공의)'과정을 하게 된다는 것과, 이 '레지던트(resident, 전공의)'의 뜻이 '거주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인턴, intern'이라는 말은 '피억류자(internee)'에서 오게 되었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intern [intə́ːrn] vt. 
(일정 구역[항구]내에) 억류[구금]하다(in)(교전국의 포로·선박·국민 등을); (위험 인물 등을) 강제 수용[격리]하다.
┈┈•∼ an alien 외국인을 억류하다.
 
intern [-́-] n. 
피억류자 (internee)

 실제로, 피억류자의 신분에 걸맞게 병원의 인턴들은 병원을 거의 벗어날 수 없고, 매일 평균 20시간 이상의 근무에 시달린다. 또, 일년내내 여러 과를 돌면서 일을 해야하는데, 소속감도 없고, 학생처럼 각 턴에서 성적이 매겨지고, 그 성적이 나쁘거나, 지원 경쟁에서 떨어지면 병원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뭐든지 마음대로 시키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도 다반사로 있지만, 어디가서 그 속내를 들어낼 수도 없는 경우도 많다. 군대로 치면 방금 자대에 배치 받은 이등병 쯤 될까. 모두에게 만만한 존재. 누군가 시키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기 때문에 무리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드물게 사고를 치고 고문관 딱지를 받거나, 부조리함과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그만두기도 한다.

인턴의 근무 형태
- 기본적으로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은 없다. (연간 법정 휴가 14일 제외)
- 당직 / 원내 오프 / 오프  3단계 구성
- 당직 : 밤새워서 근무한다. 언제든지 전화가 오며, 통상의 인턴잡에서 - 어떤 잡일까지 다한다.
- 원내 오프 : 야간에는 병동 업무가 줄어든다. 속칭 몰아주기. 두명의 인턴중 한명이 당직을 하며 '콜'을 받고, 한명은 병원안에서 쉰다. 응급 상황이 생기거나, 레지던트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 오프 : 병원을 벗어날 수 있다. 허락을 받은 경우 병원 전화기를 끌 수 있다. (12시간 오프 혹은 18시간 오프 처럼 시간이 정해져있음)
- 풀당 : 매일밤 당직이다. 일이 많은 과의 경우 회진 때 서서 자는 내공을 보여준다. 필자는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져 잔적도 있다.
- 퐁 : 오프와 당직을 번갈아서 하는 경우. (대부분 원내오프를 말함, 이틀 중 하루 잘 시간을 확보해주는 의미)
- 퐁퐁 : 이틀 오프와 하루 당직 (아마도천국)
- 퐁퐁퐁 : 삼일 오프와 하루 당직 (진짜천국)
- 주말오프 : 주말 중 하루(24시간) 정도 원외 오프를 주는 경우 (행복하다. 햇살을 맞으며 돌아다닐 수 있다)

 일이 많은과의 경우 대부분 풀당이며, 운 좋게 일과 업무를 끝내더라도 밤새도록 걸려오는 콜에 잠을 못자는 경우가 허다하며, 응급상황이 많은 과의 경우에는 새벽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술방에 스크럽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직이라고해도 다음날 일과에는 변함이 없다.응급이 생기면 15분내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야하는 오프라도, 2~3시간 꿀잠을 청할 수 있게 만드는 원내오프라도 행복하다.

  이 글을 조금씩 써오는 동안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설날까지 오게 되었는데, 동안 원외 오프가 없어서 그 동안 택시만타면 30분 거리에있는 집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은 응급실 턴이라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만, 이 시간에는 집에 가는 것도 민폐인지라, '의사가족은 무의촌'이란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타지로갔던 초등학교-중학교 친한친구들이 5년만에 전부 모인다며 기다릴테니 12시 근무가 끝나면 바로 튀어오라고 했는데, 넘치는 환자들 마무리에 늦어지고, 겨우 가려는데 갑자기 인공호흡기가 안되는 사고가 발생해서 앰부를 짜다보니 시간이 제법지나서 전화로 친구들에게 욕만 제법 들어먹고, 5년만의 해후에는 참석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담담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행인건, 이 인턴이 1년이라는 것이고, 나에게는 이번 한달이 마지막이란 것이다. 

(불행인건, 연휴에 응급실 턴이 되었다는 것이고.)


어쨌거나, 인턴의 삶은 고달프다.

결국 이말 한마디 할려고, 둘러 둘러 돌아왔다. 이건 너무하잖아 싶어도,, 세상일 쉬운일 없다니까,, 참아본다. 고된하루를.


추.
제발 술취해서 응급실 오지마세요 ㅠ_ㅠ 너무 힘듭니다. 순식간에 한 10배쯤 더 힘들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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